오스트리아 철강 왕이었던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어머니 레오폴디네 ‘폴디’ 칼무스 사이에 8남매의 자식들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 요하네스 비트겐슈타인은 실종으로 보고되었지만, 자살로 추정된다. 둘째 아들 콘트라 쿠르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셋째 아들 루돌프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청산가리가 든 음료를 마시고 자살을 한다. 이제 남은 자녀는 두 아들과 세 명의 딸이었다. 다섯 아들 모두가 아버지의 공학적인 재능을 닮지 않고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닮았다는 것이 바로 이 가문의 불행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1차 세계 대전), 파울은 참전을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의무이자 시민의 의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환상지통 그 원인이 무엇이든 증상은 몹시 고통스럽다. 더 이상 그 자리에 팔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한다고 해서 환자의 고통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팔이 제자리에 없다는 걸 두 눈으로 아무리 확인해도 통증은 계속 될 테니까?
이 시점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보여 지기 때문에 인식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 지는 것일까?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물음인 것 같다. 또한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가?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단순히 눈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닌, 그것 보다 더 확실한 근본적인 증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출발이었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증명, 또는 앎이란 어디서 오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에 대한 의문, 이런 것들이 우리의 철학적 고민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
오른쪽 팔을 잃었지만 직업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이어가려는 파울의 결심은 옴스크 병원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인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파울은 성공 아니면 실패가 아니라, 성공 아니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파울은 아버지로부터 두려움에 맞서고 자기 연민을 경멸하도록 훈련 받았으며, 이 교훈들은 마음에 새겼다. 그는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친구들의 동정과 선의를 아주 무례한 태도로 묵살했다.
니체는 연민의 정을 아주 경멸했다. 자기극복 의지를 무너뜨리고 하향평준화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파울은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 바다로 나가 한 팔로 수영하고, 철골 구조물 위로 올라가 균형을 유지하며 가로지르는 등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포로로 있는 동안 파울은 낡고 조율되지 않은 upright piano 앞에서 석 달 동안 매일 같이 연습했다. 동정심 많은 러시아 보초병이 피아노를 호텔로 가지고 왔다는 말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채 호텔 벽장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째든, 파울의 목적은 그가 기억하는 한 최대한 많은 곡을 편곡해 왼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레포스트로 옮겨진 후 모든 악기들이 압수되었다. 그리고 동료 포로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파울을 교환 명단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파울은 포로 교환으로 귀국하여 재수술 후, 절단된 팔이 치료되면 즉시 의수를 맞추려고 했으나 한 번도 실천한 적은 없다. 대신 평생 동안 재킷의 비어있는 한쪽 소매를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깔끔하게 밀어 넣고 다녔다. 그의 어머니가 막내 루트비히에게 보낸 서한에서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파울은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의 종교적인 경향은 대체로 쇼펜하우어를 따랐고, 그의 많은 철학 저작물들을 외울 정도였다. “종교는 최고의 동물 기술훈련이다. 사람이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훈련시키니 말이다.” 파울은 이 같은 입장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루트비히는 이제 무신론자인 버트런트 러쎌과 조지 무어와의 우정이 재개되었다. 그가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했을 때, 많은 철학자들은 이것을 철학 논문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한 복음서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우울한 “신비주의를 향한 욕망”을 발견했다. |
파울이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두 손 피아니스트의 반만이라도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대중들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광고를 보고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가 아닌, 마치 마술사나 유원지의 전시품을 구경하기 위해 티켓을 구입했다. 루트비히는 이런 이유로 ‘형’의 연주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파울은 1916년 그의 재산 100만 크로넨을 기부했는데, 그 해에 국가에서 전쟁포로들의 의복에 지원한 전체 금액의 20분의 1에 해당한다.
한편, 루트비히는 가장 위험한 교전이 벌어지는 지역에 배치해달라고 수시로 상관을 졸랐다. 그 공로로 훈장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또한 1916년 파울은 용감한 활약을 인정받아 무공십자훈장(3등급)을 받아 중위로 진급했다. 10월에는 2등급의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파울은 의연하게 슬픔을 견디겠노라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 마침내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현실-이상). 그를 잘 돌보아주었던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하녀 로잘리가 죽자 파울은 예민함이 심해져서 손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격하게 화를 폭발하곤 했다. 그는 그런 그의 성격에 스스로도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파울도 좀처럼 성질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건 그의 형제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세 형제가 모일 때면 언제나 최악의 말싸움이 벌어졌다. 파울은 1915년 11월 빈에 돌아온 순간부터 다시 참전을 결심했고, 동생과 마찬가지로 가장 위험한 지역에 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침내 1917년 8월 소집 영장을 받았고, 어머니와 다른 누나들은 대체로 그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데 동의했지만, 헤르미네는 전선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 배치되길 바라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1918년 8월 파울은 제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형 쿠르트가 1918년 10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 전선에서 후퇴하는 길에 뚜렷한 이유 없이 총으로 자살한다.
❶ 파울(넷째)의 견해 : 쿠르트는 미국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으로 병역을 복귀했고, 적의 포화 앞으로 돌진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겼다. 미국의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 두려웠다.
❷ 그레틀(여섯째 쿠르트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스톤버러의 견해(그레틀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여겨짐) : 쿠르트가 이탈리아군의 포로로 잡히길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오스트리아 장교들처럼 총으로 자살했다.
❸ 파울(일곱째)의 딸 요하나의 견해 : 쿠르트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피아베강을 건너도록 지시를 받았다 뒤이어 지휘관과 심한 언쟁이 붙었는데 쿠르트는 “나는 우리 부대원을 헛되이 희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전쟁은 이미 졌어요.” 그리고 권총을 빼어들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고, 놀란 지휘관은 뒤로 물러서며 군법회의를 들먹거리며 위협했다. 그리고 쿠르트는 그의 부대원들을 소환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 잠시 후 총으로 자살했다.
❹ 네 번째 견해 : 쿠르트가 부대원들에게 전투를 지시했으나 부대원들이 반발했고 그에게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부대원과 함께 탈영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 싸우다 포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머리에 탄환을 박을 것인가? 그는 결국 마지막을 선택했다.
어떤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는 어쩌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째든 그의 유해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첫째 딸 헤르미네는 쿠르트의 죽음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개념인 ‘강한 의무감’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느 순간에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전쟁 중에 그렇게 드물지 않게 일어나니까.”라고 생각했다. 쿠르트의 사망으로 그의 철강공장 주식은 동업자인 “다너”가 넘겨받았다.
1918년 11월 중순,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합스부르크 왕정은 해체되었다. 한 때 군국주의 자유무역 시대의 중심지이자 드넓은 유럽제국의 중심지였던 빈은 변화하는 형세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후 1년 동안 오스트리아 아동의 96%가 공식적으로 영양결핍으로 분류되었다.
그레틀-파울의 관계 : 파울이 국가가 발행한 전쟁채권에 상당 부분을 투자해 손실을 보았고, 그 이후로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다섯 형제가 모이면 다들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려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19년 8월 말, 빈에 도착한 루트비히는 곧 바로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을 찾아가 더 이상 돈을 원하지 않으며 재산 전액을 처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지점장은 깜짝 놀라 이것은 “재정적 자살”이라고 일컬었다. 헤르미네는 그가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보다 그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어째든, 루트비히는 ‘돈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믿었고, 형제들은 이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타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카를(아버지)의 큰형인 파울 삼촌은 루트비히의 돈을 받은 형제들에게 격분했고,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한 동생을 이용했다며 그들을 맹비난했다.
한편, 빈을 점령하려는 볼셰비키의 위협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1919년 유대인 볼셰비키 지도자 벨라 쿤(Bela Kun)이 집권에 실패하면서 헝가리로부터 더 많은 수의 유대인이 빈으로 밀어 닥쳤다. 쿤은 빈과 베를린에서 마르크스 혁명을 선동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소련에서 스탈린의 암살범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삶을 마감했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떤 미심쩍은 일에, 어떤 더러운 일에 적어도 한명의 유대인이라도 관여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이런 종류의 종기에 나이프를 대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썩어가는 시체 속에 파고드는 구더기처럼, 작은 유대인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썼다. |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파울은 “모든 유대인의 마음에는 부정직한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라고 믿었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루트비히는 어느 글에서 유대인을 오스트리아 사회의 종양으로 비유했다.
스톤버러 부부(그레텔)은 오스트리아 기근 구호를 위해 미국에서 모금 운동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완벽하게 그레텔은 비네 있을 때 큰 언니 헤르미네를 좀처럼 만나지 않았다. 헤르미네의 자존감이 워낙 낮아서 누구의 충고도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9년 헤르미네의 나이는 45세였다.
❮1922년 11월❯마침내「논리철학논고」가 영어 번역보다 버트런드 러쎌의 서문이 있는 독일어 판으로 출간되었다. 루트비히와 철학을 논하던 친구들은 그에게 케임브리지로 돌아올 것을 제안했다. 루트비히는 파울 엥겔만에게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는데, 나중에 엥겔만은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시인했다.
독일의 훌륭한 논리철학 프레게조차도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루트비히는 러쎌에게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논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수천 권의 책들이 출판되었다. 내용은 매번 이전 책들과 달랐다.
그의 어머니는 쿠르트(둘째)의 죽음(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권총자살) 이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부터 육체와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궤도를 따라 서서히, 지속적으로 꺼져만 갔다. 눈은 거의 실명되어갔고, 정신은 노쇠해 노망기를 보였고, 삶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비트겐슈타인의 부인의 피아노 연주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다. 1926년 6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한편, 1928년 10월 파울은 미국에서 순회 연주회를 열어 성공했다. 드디어 한 손만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파울은 1년에 한두 번 씩 영국에 있는 친구 마르가 데네케를 방문했다. 마르가는 파울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의 친분은 좋은 우정으로 무르익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의리를 지켰으며, 나는 그보다 연상이어서 그가 욱하고 성질을 부려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파울은 마르가의 도움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파울은 라벨에게 (당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러시아의 작곡가) 자신의 연주회에 초대를 제안했다. 그가 자신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줄 것을 기대했다. 마침내 파울과 라벨 간의 거래가 해결되었고, 그 유명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했다. 그러나 파울은 라벨의 작품에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연주를 했고,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라벨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졌다. 파울은 라벨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연주자에게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이다.”라고 대꾸했다. 작곡가의 정신이 말년으로 갈수록 계속 악화되면서 이 마지막 말은 그의 만트라가 되다시피 했고, 파울 비트겐슈타인 이름만 나와도 반사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든 이러한 오랜 갈등상태 후 파울은 결국 라벨이 옳다는 것은 인정하며 굴복했다. 라벨은 점점 쇠약해졌고,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파리의 한 병원에서 뇌수술에 실패해 1937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파울이 한 손으로 능숙하게 점심을 먹는 모습에 인상을 받았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파울은 그의 집에서 쇼팽, 모차르트, 푸치니 곡들로 자신의 연주 기법을 증명해 보였다. 파울의 주치의였던 메이에르트홀트의 아내는 파울이 음악적 기교에 도취되어 나중에 프로코피예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럽게 연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어야 했던 한 남자의 영혼을 느꼈답니다.” 그러나 그의 연주가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던 프로코피예프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왼손에 무슨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의 불행이 뜻밖의 행운을 가져 온 건지도 모르지요, 왼손으로만 연주하니까 대단한 거지, 아무 두 손으로 연주한다면 수많은 평범한 피아니스트보다 나을게 없을 겁니다.”
파울은 볼세비키 사상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메이예르홀트와 그의 아내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메이예르홀트는 ‘트로츠키파의 행동대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다 옥중에서 총살되었다.
파울이 라벨과 삐거덕대던 시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루마니아 여성, 바시아 모스코비치는 가수였다고 전해지는데 공연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변변치 않은 유대계 출신인데다, 파울이 자신의 신경질적인 성격 때문에 기본적으로 결혼 생활이 맞지 않았던 터라, 파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여름 바시아는 파울의 아이를 임신했고, 궁지에 몰린 파울은 그의 누이 그레틀에게 그 위기 상황에 대해 도움을 청했다. 그레틀은 낙태를 종용했고, 낙태수술이 너무 늦은 상태라 수술은 잘못되었고, 바시아는 1931년 늦은 가을이 되도록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어께에 종양이 생겼고, 결국 1932년 4월 바시아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죽은지 2년 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난 파울은 1934년 11월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고,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관객은 연주자의 오른쪽 소매가 빈 채로 옆에 늘어뜨려져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연주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1934년 10월, 47살의 파울은 검은 머리에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며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그의 피아노 제자인 매력적인 한 여자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힐데(Hilde)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치터(현악기의 일종)의 연주자이며, 좌파 로마 가톨릭 신자인 프란츠 샤니아의 딸이었다.
힐데는 말년에 시력이 심각하게 약해졌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자신 있게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물건에 부딪치지 않고 집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종 눈치채지 못했다. 시력이 나쁘다보니 크고 검은 눈동자로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아야 했는데 한 세대 전에 구스타프 말러, 쳄린스키(이상 작곡가),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가(이상 화가), 프란츠 베르펠(소설가), 발터 그로피우스(건축가)가 경미한 청각 장애 때문에 남자들이 이야기 할때 입술을 빤히 응시해야 했던 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가씨 <알마 쉰들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것처럼 남자들은 힐데의 이런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
1932년 5월 카리스마가 강한 우익 정치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의 수상이 되어,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선동을 억제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를 대공황의 늪에서 꺼내 번영시키려 했다. 8개월 후, 히틀러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독일 총리로 당선되었다.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통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돌푸스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군복을 입은 나치 스파이들의 총에 돌푸스는 사망했고, 히틀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독일은 병력을 오스트리아로 진군시켰다. 이제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제국의 한 지마 오스트마르크가 된 것이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법에 유대인이란 적어도 3세대 위 유대인 조부의 후손이거나, 1935년 9월 15일 이래로 시작해 그 이후에 유대인이나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과 결혼한 경우 2세대 위 유대인 조부의 후손으로 정의된다고 명시되었다. 이러한 법은 나치 당원들조차도 유대인 혈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왈츠의 왕” 요한 스트라우스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들은 유대인 등록부에서 그의 기록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루트비히는 합병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일랜드에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파울과 헤르미네에게 편지를 써서, 필요하며 지체 없이 빈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경제학자인 친구 피에로 스라파에게 조언을 요청해 예비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비트겐슈티인 가족은 자신들의 유대인 혈통이 새 정권에 반대된다 할지라도 오스트리아의 공인으로서 워낙 가문의 명망이 높으므로 특별히 보호받을 거라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한편 국가 재건 및 재무장을 위한 히틀러의 4개년 계획은 워낙 많은 비용이 드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수입원을 찾기 급급했던 히틀러는 출신/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은 해외 자산을 밝혀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 했다. 모든 유대인들은 독일 제국에 보유한 재산들을 비롯해 모든 재산 목록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출해야 했다. 헤르미네, 파울, 헬레네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때는 모두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가 되었다. 당시 헤르미네는 63세, 헬레네는 59세, 그레틀은 56세였다. 이 때 파울은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 힐데와 딸들은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에서 여전히 파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정적으로도 궁핍했다. 파울은 재빨리 악기들을 팔아 일시적으로나마 재정 문제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938년 11월 힐데와 가정교사 롤리, 그리고 두 아이는 마침내 임시 비자를 발급받고 스위스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에 초청형식(연주회, 교수 등)으로 입국하기를 기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자가 만료되어 아바나로 향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수 년 동안 빈은 프랑스와 영국, 소련, 미국 등의 점령 지역으로 나뉘었다. 루트비히는 9년 만에 처음으로 빈에 돌아왔다. 케임브리지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일랜드로 가서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지냈다. 빈에 돌아온 그는 큰누나 헤르미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헤르미네는 1950년 2월 사망한다. 열등감과 사회성 부족으로 위축된 삶을 살았던 헤르미네는 75생애를 마감했다. 루트비히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그리고 1년 뒤 그는 예순 두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에게 베번부인이 “오래 오래 사세요.”라고 하자, 루트비히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루트비히는 그의 마지막 철학 사상을 기록했다.
꿈을 꾸면서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록 그때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한다 해도 옳지 않다. 이것은 실제로 비가 오는 동안 그가 꿈속에서 “비가 온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과 같다. 비록 그의 꿈이 빗소리와 실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
그는 그날 밤 베번 부인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사람들에게 제가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세요!” 1951년 4월 30일 장례식이 있었고 케임브리지 세인트 자일스(St. Giles)묘지에 묻혔다.
1958년 그레틀은 뇌졸중을 일으켰고 9월 27일 작은 병실에서 사망했다. 헤르미네가 사망하기 전, 헬레네의 딸이 암으로 사망했고, 손녀, 증손녀까지 암에 걸렸다. 헬레네는 1956년 사망했다. 그레틀은 헬레네 보다 2년을 더 살았지만, 그 기간 특별히 행복하지 않았다. 그레틀은 자매 중에 가장 따뜻하고, 유머스럽고 친절했지만 동시에, 가장 권위적이고, 가장 야심이 많았으며, 가장 속물이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961년 3월 3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일흔 세 살이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전립선암으로 고생했지만 사망 원인은 급성 페렴이었다.
힐데 비트겐슈타인은 2001년 3월까지 생존했다. 그 무렵 완전히 눈이 멀었으며 알츠하이머 병으로 의식불명상태였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1차 세계 대전), 파울은 참전을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의무이자 시민의 의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환상지통 그 원인이 무엇이든 증상은 몹시 고통스럽다. 더 이상 그 자리에 팔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한다고 해서 환자의 고통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팔이 제자리에 없다는 걸 두 눈으로 아무리 확인해도 통증은 계속 될 테니까?
이 시점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보여 지기 때문에 인식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 지는 것일까?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물음인 것 같다. 또한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가?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단순히 눈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닌, 그것 보다 더 확실한 근본적인 증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출발이었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증명, 또는 앎이란 어디서 오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에 대한 의문, 이런 것들이 우리의 철학적 고민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
오른쪽 팔을 잃었지만 직업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이어가려는 파울의 결심은 옴스크 병원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인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파울은 성공 아니면 실패가 아니라, 성공 아니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파울은 아버지로부터 두려움에 맞서고 자기 연민을 경멸하도록 훈련 받았으며, 이 교훈들은 마음에 새겼다. 그는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친구들의 동정과 선의를 아주 무례한 태도로 묵살했다.
니체는 연민의 정을 아주 경멸했다. 자기극복 의지를 무너뜨리고 하향평준화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파울은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 바다로 나가 한 팔로 수영하고, 철골 구조물 위로 올라가 균형을 유지하며 가로지르는 등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포로로 있는 동안 파울은 낡고 조율되지 않은 upright piano 앞에서 석 달 동안 매일 같이 연습했다. 동정심 많은 러시아 보초병이 피아노를 호텔로 가지고 왔다는 말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채 호텔 벽장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째든, 파울의 목적은 그가 기억하는 한 최대한 많은 곡을 편곡해 왼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레포스트로 옮겨진 후 모든 악기들이 압수되었다. 그리고 동료 포로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파울을 교환 명단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파울은 포로 교환으로 귀국하여 재수술 후, 절단된 팔이 치료되면 즉시 의수를 맞추려고 했으나 한 번도 실천한 적은 없다. 대신 평생 동안 재킷의 비어있는 한쪽 소매를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깔끔하게 밀어 넣고 다녔다. 그의 어머니가 막내 루트비히에게 보낸 서한에서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파울은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의 종교적인 경향은 대체로 쇼펜하우어를 따랐고, 그의 많은 철학 저작물들을 외울 정도였다. “종교는 최고의 동물 기술훈련이다. 사람이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훈련시키니 말이다.” 파울은 이 같은 입장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루트비히는 이제 무신론자인 버트런트 러쎌과 조지 무어와의 우정이 재개되었다. 그가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했을 때, 많은 철학자들은 이것을 철학 논문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한 복음서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우울한 “신비주의를 향한 욕망”을 발견했다. |
파울이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두 손 피아니스트의 반만이라도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대중들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광고를 보고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가 아닌, 마치 마술사나 유원지의 전시품을 구경하기 위해 티켓을 구입했다. 루트비히는 이런 이유로 ‘형’의 연주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파울은 1916년 그의 재산 100만 크로넨을 기부했는데, 그 해에 국가에서 전쟁포로들의 의복에 지원한 전체 금액의 20분의 1에 해당한다.
한편, 루트비히는 가장 위험한 교전이 벌어지는 지역에 배치해달라고 수시로 상관을 졸랐다. 그 공로로 훈장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또한 1916년 파울은 용감한 활약을 인정받아 무공십자훈장(3등급)을 받아 중위로 진급했다. 10월에는 2등급의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파울은 의연하게 슬픔을 견디겠노라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 마침내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현실-이상). 그를 잘 돌보아주었던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하녀 로잘리가 죽자 파울은 예민함이 심해져서 손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격하게 화를 폭발하곤 했다. 그는 그런 그의 성격에 스스로도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파울도 좀처럼 성질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건 그의 형제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세 형제가 모일 때면 언제나 최악의 말싸움이 벌어졌다. 파울은 1915년 11월 빈에 돌아온 순간부터 다시 참전을 결심했고, 동생과 마찬가지로 가장 위험한 지역에 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침내 1917년 8월 소집 영장을 받았고, 어머니와 다른 누나들은 대체로 그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데 동의했지만, 헤르미네는 전선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 배치되길 바라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1918년 8월 파울은 제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형 쿠르트가 1918년 10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 전선에서 후퇴하는 길에 뚜렷한 이유 없이 총으로 자살한다.
❶ 파울(넷째)의 견해 : 쿠르트는 미국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으로 병역을 복귀했고, 적의 포화 앞으로 돌진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겼다. 미국의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 두려웠다.
❷ 그레틀(여섯째 쿠르트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스톤버러의 견해(그레틀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여겨짐) : 쿠르트가 이탈리아군의 포로로 잡히길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오스트리아 장교들처럼 총으로 자살했다.
❸ 파울(일곱째)의 딸 요하나의 견해 : 쿠르트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피아베강을 건너도록 지시를 받았다 뒤이어 지휘관과 심한 언쟁이 붙었는데 쿠르트는 “나는 우리 부대원을 헛되이 희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전쟁은 이미 졌어요.” 그리고 권총을 빼어들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고, 놀란 지휘관은 뒤로 물러서며 군법회의를 들먹거리며 위협했다. 그리고 쿠르트는 그의 부대원들을 소환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 잠시 후 총으로 자살했다.
❹ 네 번째 견해 : 쿠르트가 부대원들에게 전투를 지시했으나 부대원들이 반발했고 그에게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부대원과 함께 탈영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 싸우다 포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머리에 탄환을 박을 것인가? 그는 결국 마지막을 선택했다.
어떤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는 어쩌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째든 그의 유해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첫째 딸 헤르미네는 쿠르트의 죽음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개념인 ‘강한 의무감’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느 순간에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전쟁 중에 그렇게 드물지 않게 일어나니까.”라고 생각했다. 쿠르트의 사망으로 그의 철강공장 주식은 동업자인 “다너”가 넘겨받았다.
1918년 11월 중순,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합스부르크 왕정은 해체되었다. 한 때 군국주의 자유무역 시대의 중심지이자 드넓은 유럽제국의 중심지였던 빈은 변화하는 형세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후 1년 동안 오스트리아 아동의 96%가 공식적으로 영양결핍으로 분류되었다.
그레틀-파울의 관계 : 파울이 국가가 발행한 전쟁채권에 상당 부분을 투자해 손실을 보았고, 그 이후로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다섯 형제가 모이면 다들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려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19년 8월 말, 빈에 도착한 루트비히는 곧 바로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을 찾아가 더 이상 돈을 원하지 않으며 재산 전액을 처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지점장은 깜짝 놀라 이것은 “재정적 자살”이라고 일컬었다. 헤르미네는 그가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보다 그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어째든, 루트비히는 ‘돈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믿었고, 형제들은 이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타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카를(아버지)의 큰형인 파울 삼촌은 루트비히의 돈을 받은 형제들에게 격분했고,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한 동생을 이용했다며 그들을 맹비난했다.
한편, 빈을 점령하려는 볼셰비키의 위협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1919년 유대인 볼셰비키 지도자 벨라 쿤(Bela Kun)이 집권에 실패하면서 헝가리로부터 더 많은 수의 유대인이 빈으로 밀어 닥쳤다. 쿤은 빈과 베를린에서 마르크스 혁명을 선동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소련에서 스탈린의 암살범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삶을 마감했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떤 미심쩍은 일에, 어떤 더러운 일에 적어도 한명의 유대인이라도 관여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이런 종류의 종기에 나이프를 대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썩어가는 시체 속에 파고드는 구더기처럼, 작은 유대인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썼다. |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파울은 “모든 유대인의 마음에는 부정직한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라고 믿었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루트비히는 어느 글에서 유대인을 오스트리아 사회의 종양으로 비유했다.
스톤버러 부부(그레텔)은 오스트리아 기근 구호를 위해 미국에서 모금 운동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완벽하게 그레텔은 비네 있을 때 큰 언니 헤르미네를 좀처럼 만나지 않았다. 헤르미네의 자존감이 워낙 낮아서 누구의 충고도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9년 헤르미네의 나이는 45세였다.
❮1922년 11월❯마침내「논리철학논고」가 영어 번역보다 버트런드 러쎌의 서문이 있는 독일어 판으로 출간되었다. 루트비히와 철학을 논하던 친구들은 그에게 케임브리지로 돌아올 것을 제안했다. 루트비히는 파울 엥겔만에게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는데, 나중에 엥겔만은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시인했다.
독일의 훌륭한 논리철학 프레게조차도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루트비히는 러쎌에게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논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수천 권의 책들이 출판되었다. 내용은 매번 이전 책들과 달랐다.
그의 어머니는 쿠르트(둘째)의 죽음(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권총자살) 이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부터 육체와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궤도를 따라 서서히, 지속적으로 꺼져만 갔다. 눈은 거의 실명되어갔고, 정신은 노쇠해 노망기를 보였고, 삶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비트겐슈타인의 부인의 피아노 연주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다. 1926년 6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한편, 1928년 10월 파울은 미국에서 순회 연주회를 열어 성공했다. 드디어 한 손만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파울은 1년에 한두 번 씩 영국에 있는 친구 마르가 데네케를 방문했다. 마르가는 파울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의 친분은 좋은 우정으로 무르익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의리를 지켰으며, 나는 그보다 연상이어서 그가 욱하고 성질을 부려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파울은 마르가의 도움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파울은 라벨에게 (당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러시아의 작곡가) 자신의 연주회에 초대를 제안했다. 그가 자신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줄 것을 기대했다. 마침내 파울과 라벨 간의 거래가 해결되었고, 그 유명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했다. 그러나 파울은 라벨의 작품에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연주를 했고,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라벨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졌다. 파울은 라벨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연주자에게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이다.”라고 대꾸했다. 작곡가의 정신이 말년으로 갈수록 계속 악화되면서 이 마지막 말은 그의 만트라가 되다시피 했고, 파울 비트겐슈타인 이름만 나와도 반사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든 이러한 오랜 갈등상태 후 파울은 결국 라벨이 옳다는 것은 인정하며 굴복했다. 라벨은 점점 쇠약해졌고,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파리의 한 병원에서 뇌수술에 실패해 1937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파울이 한 손으로 능숙하게 점심을 먹는 모습에 인상을 받았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파울은 그의 집에서 쇼팽, 모차르트, 푸치니 곡들로 자신의 연주 기법을 증명해 보였다. 파울의 주치의였던 메이에르트홀트의 아내는 파울이 음악적 기교에 도취되어 나중에 프로코피예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럽게 연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어야 했던 한 남자의 영혼을 느꼈답니다.” 그러나 그의 연주가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던 프로코피예프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왼손에 무슨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의 불행이 뜻밖의 행운을 가져 온 건지도 모르지요, 왼손으로만 연주하니까 대단한 거지, 아무 두 손으로 연주한다면 수많은 평범한 피아니스트보다 나을게 없을 겁니다.”
파울은 볼세비키 사상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메이예르홀트와 그의 아내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메이예르홀트는 ‘트로츠키파의 행동대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다 옥중에서 총살되었다.
파울이 라벨과 삐거덕대던 시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루마니아 여성, 바시아 모스코비치는 가수였다고 전해지는데 공연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변변치 않은 유대계 출신인데다, 파울이 자신의 신경질적인 성격 때문에 기본적으로 결혼 생활이 맞지 않았던 터라, 파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여름 바시아는 파울의 아이를 임신했고, 궁지에 몰린 파울은 그의 누이 그레틀에게 그 위기 상황에 대해 도움을 청했다. 그레틀은 낙태를 종용했고, 낙태수술이 너무 늦은 상태라 수술은 잘못되었고, 바시아는 1931년 늦은 가을이 되도록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어께에 종양이 생겼고, 결국 1932년 4월 바시아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죽은지 2년 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난 파울은 1934년 11월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고,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관객은 연주자의 오른쪽 소매가 빈 채로 옆에 늘어뜨려져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연주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1934년 10월, 47살의 파울은 검은 머리에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며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그의 피아노 제자인 매력적인 한 여자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힐데(Hilde)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치터(현악기의 일종)의 연주자이며, 좌파 로마 가톨릭 신자인 프란츠 샤니아의 딸이었다.
힐데는 말년에 시력이 심각하게 약해졌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자신 있게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물건에 부딪치지 않고 집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종 눈치채지 못했다. 시력이 나쁘다보니 크고 검은 눈동자로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아야 했는데 한 세대 전에 구스타프 말러, 쳄린스키(이상 작곡가),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가(이상 화가), 프란츠 베르펠(소설가), 발터 그로피우스(건축가)가 경미한 청각 장애 때문에 남자들이 이야기 할때 입술을 빤히 응시해야 했던 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가씨 <알마 쉰들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것처럼 남자들은 힐데의 이런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
1932년 5월 카리스마가 강한 우익 정치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의 수상이 되어,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선동을 억제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를 대공황의 늪에서 꺼내 번영시키려 했다. 8개월 후, 히틀러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독일 총리로 당선되었다.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통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돌푸스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군복을 입은 나치 스파이들의 총에 돌푸스는 사망했고, 히틀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독일은 병력을 오스트리아로 진군시켰다. 이제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제국의 한 지마 오스트마르크가 된 것이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법에 유대인이란 적어도 3세대 위 유대인 조부의 후손이거나, 1935년 9월 15일 이래로 시작해 그 이후에 유대인이나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과 결혼한 경우 2세대 위 유대인 조부의 후손으로 정의된다고 명시되었다. 이러한 법은 나치 당원들조차도 유대인 혈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왈츠의 왕” 요한 스트라우스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들은 유대인 등록부에서 그의 기록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루트비히는 합병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일랜드에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파울과 헤르미네에게 편지를 써서, 필요하며 지체 없이 빈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경제학자인 친구 피에로 스라파에게 조언을 요청해 예비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비트겐슈티인 가족은 자신들의 유대인 혈통이 새 정권에 반대된다 할지라도 오스트리아의 공인으로서 워낙 가문의 명망이 높으므로 특별히 보호받을 거라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한편 국가 재건 및 재무장을 위한 히틀러의 4개년 계획은 워낙 많은 비용이 드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수입원을 찾기 급급했던 히틀러는 출신/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은 해외 자산을 밝혀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 했다. 모든 유대인들은 독일 제국에 보유한 재산들을 비롯해 모든 재산 목록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출해야 했다. 헤르미네, 파울, 헬레네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때는 모두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가 되었다. 당시 헤르미네는 63세, 헬레네는 59세, 그레틀은 56세였다. 이 때 파울은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 힐데와 딸들은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에서 여전히 파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정적으로도 궁핍했다. 파울은 재빨리 악기들을 팔아 일시적으로나마 재정 문제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938년 11월 힐데와 가정교사 롤리, 그리고 두 아이는 마침내 임시 비자를 발급받고 스위스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에 초청형식(연주회, 교수 등)으로 입국하기를 기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자가 만료되어 아바나로 향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수 년 동안 빈은 프랑스와 영국, 소련, 미국 등의 점령 지역으로 나뉘었다. 루트비히는 9년 만에 처음으로 빈에 돌아왔다. 케임브리지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일랜드로 가서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지냈다. 빈에 돌아온 그는 큰누나 헤르미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헤르미네는 1950년 2월 사망한다. 열등감과 사회성 부족으로 위축된 삶을 살았던 헤르미네는 75생애를 마감했다. 루트비히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그리고 1년 뒤 그는 예순 두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에게 베번부인이 “오래 오래 사세요.”라고 하자, 루트비히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루트비히는 그의 마지막 철학 사상을 기록했다.
꿈을 꾸면서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록 그때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한다 해도 옳지 않다. 이것은 실제로 비가 오는 동안 그가 꿈속에서 “비가 온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과 같다. 비록 그의 꿈이 빗소리와 실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
그는 그날 밤 베번 부인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사람들에게 제가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세요!” 1951년 4월 30일 장례식이 있었고 케임브리지 세인트 자일스(St. Giles)묘지에 묻혔다.
1958년 그레틀은 뇌졸중을 일으켰고 9월 27일 작은 병실에서 사망했다. 헤르미네가 사망하기 전, 헬레네의 딸이 암으로 사망했고, 손녀, 증손녀까지 암에 걸렸다. 헬레네는 1956년 사망했다. 그레틀은 헬레네 보다 2년을 더 살았지만, 그 기간 특별히 행복하지 않았다. 그레틀은 자매 중에 가장 따뜻하고, 유머스럽고 친절했지만 동시에, 가장 권위적이고, 가장 야심이 많았으며, 가장 속물이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961년 3월 3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일흔 세 살이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전립선암으로 고생했지만 사망 원인은 급성 페렴이었다.
힐데 비트겐슈타인은 2001년 3월까지 생존했다. 그 무렵 완전히 눈이 멀었으며 알츠하이머 병으로 의식불명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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